많은 사람들이 행복전도사를 자처하고 대학에 행복학 강의가 개설될 만큼 행복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이러한 행복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반증일 수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요즘 세간에 회자되는 전세사기 피해자, 음주운전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의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있을까?
아니, 이런 거창한 것들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이코 같은 직장 상사와 말썽만 부리는 막내 아이에서부터, 아침에 손톱 사이에 박힌 가시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고통과 불만은 끝이 없다.
‘인생은 고해’라고 하신 부처님 말씀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낮에 직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던 사람은 저녁 식사 시간에 모처럼 만난 죽마고우와의 술자리를 편하게 즐기기 어렵다. 반가운 친구와의 모처럼 술자리에서조차 환하게 웃을 수 없는 이유는 뭘까? 하나는 ‘억울한 일 자체’이고, 둘은 ‘그 일에 대한 착심’ 일 것이다.
우리의 본성을 텅 비어 고요하다는 의미에서 공적(空寂, 텅 비고 고요한) 혹은 진공(眞空, 완전히 텅 빈)이라고 한다.
수행을 통해 마음이 텅 비게 되면 우선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또한 마음이 텅 비게 되면 환하게 밝아진다. 이를 영지(靈知, 신령스런 지혜) 또는 묘유(妙有, 묘하게 있어지는 것)라고 한다. 형광등이 켜지면 책상 모서리가 훤히 보이기 때문에 더 이상 부딪히지 않듯이, 지혜가 생기면 바른 판단과 바른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악업을 면하게 된다. 두 가지가 모두 해결되는 셈이다.
근처 명상센터에 방문한 적이 있다. 정문에 “왜 그렇게 심각하시나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단순히 견학을 위해 명상센터를 방문한 순간조차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들로 심각해 있는 나를 보고 뜨끔했다.
나를 더욱 당황하게 한 것은 그 순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을 특별한 이유 없이 심각하게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센터 입구의 “복잡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당신의 머릿속입니다.”는 문구는 가히 충격이었다.
“왜 그렇게 심각하시나요? 복잡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당신의 머릿속입니다.” 불법의 정수라 할 만하다.
3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