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후 객원기자
서울원문화해설단은 3월 30일 꼭 백년전 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 첫걸음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기념식을 가졌다.
30일 아침 종로의 동쪽끝 흥인지문에서 낙산공원 방향으로 봉제골목을 쭉 걸어올라가다보니 빽빽한 집들 사이로 한옥이 보였다. 100년전 소태산을 중심으로 구성된 불법연구회 모임을 위하여 이동진화 선진의 희사로 마련되었던 창신동 출장소이다. 이 공간은 겹처마가 겹쳐서 이어진 두개의 아담한 목조기와집이다. 그 옛날에도 이러하였을까. 지금이야 간곳없는 계곡이 흐르는 산길을 오르면 당도하는 곳이었다 한다. 지금은 차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아스팔트 길위에 상가들이 즐비하게 세월이 무상하여도 구도의 열기만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하나둘 쏙쏙 모여들더니 이윽고 11시에 이르러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상쾌한 아침의 종소리가 울리며 입정에 들어갔다. 이어서 원문화해설단장의 기도가 이어졌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100년전 오늘 정신과 물질의 조화로운 문명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세우고 귀한 인연들을 만나고자 서울로 오셨으니 그 까닭을 새겨보는 시간을 함께 가지고 각자의 소임을 다하는 단원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앞으로 정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뜻을 전하였다.
따르릉! 기도가 끝나자 대종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교무님이 소식을 전한다. 완행열차 3등칸을 타고 오셨는데 시간이 되는 분들은 경성역 앞에 모이고 시간이 안되는 분들은 태평여관으로 오세요. 당시 소태산은 내장사에 머무르며 불교개혁의 기치를 올렸으나 다행스럽게도 내장사 승려들의 반대에 부딪혀 산골에서 벗어나 보다 큰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발걸음을 따라가보자.
소풍에 없으면 섭섭한 김밥을 먹고 다들 시간이 되어 경성역으로 출발하였다.
서울역 앞의 시계탑은 한세기 동안 쉬지않고 흘러왔다. 소태산은 한세기를 건너와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여독을 풀고 묵을 만한 곳을 찾아갔다.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기술을 앞세운 힘겨루기의 치열한 격전지였던 경성.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제시대 사람들은 “태평성세”가 얼마나 간절하였겠는가! 두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당시 민족자결주의 물결이 일어나 온세상에 퍼져가고 독립과 계몽운동이 기치를 올리던 일제시대의 경성은 소태산 대종사의 개교표어를 실천해 보기 좋은 지역이었다.
누구나 여래가 되는 길을 열어주신 선각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사명에 긍지를 지닌 해설단은 숭례문 앞에 이르러 서로의 노고에 고마움을 전하며 기념순례를 마쳤다.
태평여관은 어디에 있는가. 앞서간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질문을 던져보는 뜻깊은 성찰의 시간이었다. 어느 길을 가겠는가?
4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