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마음에 숨통을 틔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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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마음에 숨통을 틔워라”
  • 한울안신문
  • 승인 2024.05.29 21:13
  • 호수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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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당  김대은 교도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숙명적으로 다양한 생각을 일으키고 숱한 감정을 노출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개인의 생각과 감정도 극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며 불투명하고 순간적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마음도 수시로 흔들리고 떠돌며 정처 없이 배회하고 방황하기 일쑤다.
마조에게 제자인 대매가 부처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마조가 부처는 마음이라(卽心卽佛)고 답했고 그 순간 문득 대매의 눈이 열렸다. 그 후 대매는 다시 자신의 스승이 마음은 부처가 아니라(非心非佛)고 했다는 전갈을 접한다. 이에 그는 그 늙은이가 아직도 세상을 어지럽히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자신은 즉심즉불을 포기할 의사가 없으며 여전히 이 가르침을 지키겠노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이런 경위를 접한 마조는 제자의 깨달음의 경지를 확인하고 주위에 이제 매실이 다 익었으니 실컷 수확해도 된다고 일렀다.
깨달음은 순차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며 점진적으로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혹독한 생활이나 소승적 명상의 방식으로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나 기대는 헛된 꿈이다. 수행의 순서와  과위(果位)의 과정을 설하는 방편론은 도리어 깨달음에 장애가 되기 쉽다. 무명과 각성, 진애(塵埃)와 법계는 간발의 차이이다. 따라서 일상이 곧 궁극이고 우리 자신이 바로 부처인 셈이된다. 
하지만 분별심으로 인한 종종의 훼방으로 빈번히 재고 따지는 심사와 수시로 버리고 취하는 태도 때문에 부처의 걸음이 휘청거리고 있다. 이 말에 마조의 마음이 훤히 뚫렸는데 그 현상은 시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적이자 영원한 흐름 속에서 발생하고 실현된 사건이었다.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운용하는 중생은 모두 부처다. 마음이 부처라고 한 마조의 선언은 과장이나 빈말이 아니며 우주의 이치이자 삶의 진리이다. 인간은 마음을 움직여 두려움도 일어나게 하고 적개심도 생겨나게 하며 근심과 걱정도 만들어낸다. 물론 이타심도 발생시키고 즐거움도 생성해내며 사랑과 기쁨도 유발시킨다. 그리고 각각의 마음은 각각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여기고 마음을 붙들고 부처를 붙잡고자 한다. 그래서 마조는 이런 행태에 경각심을 줄 요량으로 다시 비심비불이라고 전했다. 각각의 마음은 마음이 아니며 따라서 각각의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고 말이다. 마음이 부처인 상태와 마음이 부처가 아닌 사태는 같은 곳을 가리키며 이때 대매산의 매실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잡고 묶고 막으면 어떤 마음도 상하고 병든다. 머물렀으면 흘러야 하듯이 잡았으면 놓아야 하고 묶었으면 풀어야 하며 막았으면 터주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에 피도 돌고 그 마음이 숨도 쉴 수 있으며 그래야 그 마음은 비로소 부처가 된다. 즉심즉불과 비심비불은 각각 의심에 빠져있고 비관에 젖어있는 자들에 대한 격려이며 과신에 물들어있고 낙관에 부풀어있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대매에게는 흘러간 흔적이며 지나간 자취일 뿐이다.
마음은 순환을 필요로 하며 즉심즉불과 비심비불은 바로 그 전환의 과정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도 아기를 보는 사람은 아기의 행동을 적절하게 규제하면서 아기를 자유롭게 놀게 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붙잡고 굳게 앉아서 지키고 구속하는 것은 아기를 괴롭게 하는 행태라고 하면서 이를 일심에 집착하는 법박(法縛)에 비유했다. 일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법박에 걸리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대종사의 당부는 일어나는 마음에 숨통을 틔워주라는 말씀에 다름 아니다.

 

 

5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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