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산 방길튼 교무(안산국제교당)
한울안신문은 소태산 대종사가 서울에 오신 100년을 맞이하여, 길산 방길튼 안산국제교당 교무와 서울원문화해설단 박혜현 단장 및 윤지승 단원과 함께 ‘서울성적지연구회(가칭)’를 조직하여 지난 3월 4일(월)에 「제1회 서울 성적지 연구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서울성적지 연구보고를 총10회 구성, 매월 1회씩 게재코자 한다. <편집자 주>
원기9년(1924) 음력 2월 25일(3.30)에 소태산은 최도화의 안내에 따라 서중안, 송규, 전음광과 함께 상경하여 태평여관에 하루 묵는다. 다음날 박사시화를 만나 그녀의 쌍둥이 동생(박공명선)의 딸인 성성원의 집으로 인도되어 3~4일간 머문 후 음력 2월 29일(4.3) 당주동의 건물을 임차하여 임시출장소로 삼는다. 이후 음력 3월 29일(5.2)까지 이곳에 근 1달간 주재한다.
경성임시출장소 관련 기록은 「불법연구회 창건사」 제15장 시창 9년(갑자) 편과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 역사』 박공명선 편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서중안의 주선으로 시내 당주동에 1개월 한정하고 가옥 20여 칸을 차대借貸하여 임시출장소를 정하신바” (송규, 「불법연구회창건사」)
“갑자 원기9년 … 동월[음 2월] 회일晦日[그믐, 29일]에 법가 당주동으로 이거移居하옵시니 밤이면 당주동으로 가서 청법낙도聽法樂道하였고 힘자라는 데까지 조력하였다.” (이공주, 『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 역사』 박공명선 편)
정산종사는 「불법연구회 창건사」에서 당주동 소재의 20여 칸 집을 빌려 임시출장소를 마련했다고 기술한다. 20여 칸의 당주동 경성임시출장소는 개인주택보다는 여관일 가능성이 높다. 대가(貸家, 셋집)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20여 칸을 세놓을 대가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조선식 여관의 하숙옥 이외에 1박이 아닌 1개월간 숙식을 제공하는 하숙을 여관에서도 겸하고 있었다. 이를 하숙여관 또는 여관하숙이라 하였다(박철수 외, 『경성의 아ㅅ바트』).
1929년 9월 20일 홍문사에서 발행한 『경성편람』에 제시된 당주동의 여관 현황이다.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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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 |
수용인원 |
송죽여관 |
2 |
38 |
대창여관 |
42 |
52 |
당주여관 |
63 |
60 |
봉상여관 |
104 |
20 |
금산여관 |
167 |
36 |
『경성편람』에 따르면 당주동에 여관 5곳이 등장한다. 아마도 1924년 4월 한 달간 빌린 20여 칸 가옥의 경성임시출장소는 이곳 여관과 관련 있다 할 것이다.
만일 한 칸에 1명 숙박 가능한 규모라면 20명 수용이고, 1칸에 2명 숙박할 수 있는 규모라면 40명 내외 수용일 것이다. 20명 수용이면 봉상여관(104번지)이 해당되고, 40명 내외 수용이면 송죽여관(2번지)과 금산여관(167번지)이 해당된다. 봉상여관은 현재 세종빌딩 일대이며, 송죽여관은 적선정積善停 일대이고, 금산여관은 수진빌딩 일대에 해당한다.
소태산과 제자들은 이곳 여관(여관하숙, 하숙여관) 중 한 곳에 머문 듯하다. 소태산과 동행한 수행인 중 체류 경비를 감당한 제자는 김제에서 인화당약방을 운영하는 서중안이라 할 것이다. 아마도 서중안은 스승인 소태산의 적절한 교화 장소와 아울러 인연을 만나는 과정에서 위엄과 신망을 세우기 위해 건물(여관)을 통째로 빌린 듯하다.
1931년도에 발행한 〈당주동주변지적도〉에 ㄴ자형, ㄷ자형, ㅁ자형 등 다양한 구조의 가옥 모습을 볼 수 있듯이 당주동에도 이러한 구조의 한옥이 많았을 것이다.
소태산의 서울 첫 제자가 된 박사시화·박공명선 쌍둥이 자매는 밤이면 당주동 경성임시출장소를 내왕하며 청법 낙도하는 한편 정성껏 시봉의 도를 다하며, 궁가의 부인 이경수(법명: 동진화)를 이곳으로 인도한다. 이처럼 소태산은 당주동 경성임시출장소에서 이동진화를 비롯하여 그녀의 침모 김삼매화와 식모 최강동옥 그리고 만덕산 인연 이현공 및 최만수화 등도 만난다.
소태산은 당주동 경성임시출장소에서 서울 인연들을 만나 장차 서울 교화의 터전을 구축한다.
이동진화는 당주동 경성임시출장소에서 입문(음 3.1 입문, 음 6.20 입회)하여, 소태산이 던진 ‘성불제중의 큰일을 하자’는 법문(『대종경』 인도품 6장)에 왕실가의 소실이라는 신분으로 ‘구성된 삶’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 끝에 성불제중의 ‘구성하는 삶’으로 대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소태산은 익산총부를 건설하기 이전인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열기도 전에 서울행을 결단한다. 최도화에 의해 박사시화를 만나고 박사시화에 의해 서울의 인연을 하나 둘씩 만나게 된다. 이처럼 소태산에게 있어 당주동 경성임시출장소는 서울교화의 출발이요 발판이라 할 것이다.
임시출장소는 원기8년(1923)의 전주임시출장소에 이어 원기9년의 경성임시출장소가 두 번째이다. 전주임시출장소는 회상창립 준비모임 장소라면 경성임시출장소는 서울교화의 인연 규합지요 파종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원기9년의 경성임시출장소를 서울교당의 시원으로 봐야 할 것인지? 아니면 원기11년(1926) 창신동회관을 서울교당의 시작으로 봐야 할지? 전주임시출장소를 총부건설의 전초기지 역할로 본다면 경성임시출장소는 교무가 파견된 교당 역할보다는 서울의 인연을 찾아 규합하는 인연지로 봐야 할 듯하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정원’에서 당주동 경성임시출장소 추정지를 전망하거나 찾아 나서는 순례길은 소태산의 경륜과 포부를 이해하는 중요한 한 포인트다.
6월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