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우리 정토는 저녁마다 산책을 하며 참회기도를 했다. 아픈 다리를 힘겹게 옮겨가며 하늘을 보고 울부짖었다. “사은님 저를 얼마나 크게 쓰시려고 이런 경계를 주시나이까!”
그 때 내면의 소리가 들렸단다. ‘너 이래도 감사하냐?’
그 때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네 감사합니다! 비록 빚더미에 있지만 그것은 보자기에 싸놓으면 됩니다. 우리 식구들 다 건강하게 맡은 일 잘하고 있고, 먹을 쌀과 김치가 있으니 모두 감사 뿐이옵니다.”며 눈물 콧물을 쏟아가며 참회기도를 했다.
나는 그 때 앞이 보이지 않으니 잠이 오지 않아 오랫동안 고생했고 후유증에 시달렸다.
똑같은 경계를 대해도 정토는 참회기도로 그 경계에서 큰 힘을 얻었고, 나는 불면증과 이석증으로 고생했다.
학창시절, 대산종사님께서 ‘전탈전여 전신전수’ 법문을 해주셨지만 그 뜻이 들어오지 않았다. ‘진리가 전부 뺏은 후에야 비로소 전부 준다, 온통 믿으면 온통 받고, 반만 믿으면 반만 받고, 믿지 않으면 받을 게 없다’는 이 법문을 이제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육조 혜능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구절을 듣자마자 깨침이 왔다는데 중생은 언감생심이다. 우리같은 범부중생은 한 경계를 혹독하게 겪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는 것 같다. 대부분은 남 탓 하고 원망하기 바빠 그 경계가 주는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면 진리는 해결될 때까지 또 다른 경계를 준다.
바닥까지 떨어진 그 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억울하고, 분하고, 화나고, 속상한 감정을 받아들이고, 감정의 원인이 상대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일어난 현실을 거부하고 상대를 판단분별하는 생각 때문임을 알 때 묘하게 마음이 텅 비워진다. 현실을 수용할 마음그릇이 커지는 것이다.
요즘 모 원로교무님께서 대 참회기도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법문을 들으니 교단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져왔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대참회기도 기간을 정해 기도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모르는 사람은 우리 내부에 무슨 엄청난 잘못이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고, 더 근원적으로는 밑에서부터 우러나올 때 선한 영향력을 깨칠 수 있기 때문이다. 교단적 대참회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나부터 참회기도를 하자. 기도를 하면서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결사 형태로 진행하는 것이 진참회기도가 될 것이다.
교단의 여러 문제를 비판 내지 비난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러면서 그런 문제에 자기는 아무 책임이 없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든지,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것은 비난이다. 자칫 자기 생각만 옳고 상대의 생각은 그르다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히기 쉽다. ‘당신이 옳고 제가 틀렸습니다’, ‘당신은 그대로 계십시오. 제가 변하겠습니다’ 이런 심법을 가져야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 그런 심법을 가졌는가?
6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