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의 생활속 마음일기 (12) 사랑스런 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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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의 생활속 마음일기 (12) 사랑스런 질부
  • 한울안신문
  • 승인 2024.06.26 11:06
  • 호수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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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신안리 새터에 사신 87세 당숙이 나에게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우리 아버지는 무녀독남이신데 17년 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 대신 내가 고향에 가서 찾아 뵐 수 있는 어른은 5촌 당숙 뿐이다. 더구나 연로하신 분이 혼자 사시며 우리 어머니와 조부모님 산소 벌초까지 해주시기에 용돈이라도 챙기고 있는데 송구스럽게도 힘들게 농사지은 쌀을 택배로 부쳐주시곤 한다. 몇 년 전 늦가을에 맘먹고 임실에 내려가 읍내 전주회관에서 보신탕을 사드리고 댁에 모셔다드리려고 집에 들렸는데 너무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놀랐다. 시골집 마당이 풀 한 포기 없이 깨끗하고 장독대와 토방의 섬돌은 반짝반짝 빛나며 부엌 옆에 장작을 패서 쌓아놓은 나뭇단은 예술품처럼 보였다. 
조카와 조카며느리가 온다고 닭이라도 한 마리 잡으려고 생각했는데 요리에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고 하시길래 마루에 걸터앉아서 보니 요행히 목숨을 연장한 암탉이 마당을 휘젓고 다녀서 새삼스럽게 보인다. 그 닭이 낳은 자그마한 유정란 22개를 몽땅 싸주셔서 비닐에 넣으려고 비닐봉지를 찾았더니 헌 비닐봉지를 손수건 접듯이 차곡차곡 접어서 보관하고 계신다. 말씀을 나누다보니 우리 형제들이 태어난 해와 우리 아들이 나도 모르는 임술년 개띠라고 하신다. 그 연세에 총기와 기록하는 습관이 대단하시다. 집 앞에 열린 감이라면서 잘 익은 홍시감 8개를 내 오셔서 배부른데도 2개나 먹었다.
사람이 떠나 폐가가 된 뒷집을 사서 커다란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대파농사와 몇 그루의 영산홍을 심어 놨다. 87세인데도 아직도 인생에 희망을 갖고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꽃나무를 심는 열정이 대단하다. 대파를 잔뜩 뽑아 아내와 당숙이 다듬어서 커다란 비료포대 몇 개에 나누어서 담아주셔서 올라오며 전주에 사시는 외삼촌 드리고 며느리에게도 임실치즈와 함께 주고 우리 집에도 가져와 이웃에게 나눠주면서 대파에 담긴 아름다운 스토리를 얘기해줬다.
제일 놀라운 것은 2008년부터 내가 용돈 드린 내용을 한장의 종이에 날짜와 금액을 꼼꼼히 기록한 치부책을 보여 주신다. 용돈을 많이 준 순서대로 썼는데 내가 당신 아들보다 더 앞서 있으며 당숙을 챙기는 조카를 이웃에게 자랑하신단다. 그 분은 우리 조부모님과 어머니 벌초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드린 용돈은 특별한 것으로 여기시며 감사생활을 하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안 계셔서 찾아 뵐 수 있는 어른이 고향에 계신다는 사실만도 너무나 좋은데 당숙은 내가 고맙고 기특했나보다. 돌아오려는데 광에서 쌀 반가마니를 꺼내서 차에 실어 주시며 평택에 사는 우리 형님에게 갖다주라고 하시길래 서울에 오시거든 꼭 우리 집에 와서 주무시라고 신신당부 드렸고, 당숙을 찾아뵙고 돌아온 우리 부부는 너무나 행복했다 
다음 해에는 형님과 찾아뵈었는데 서울 집에 돌아오니 집 사람이 매우 기분좋게 들떠있었다. 우리가 다녀간 뒤에 당숙이 집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 질부 최고’ 라고 엄청 오래 칭찬을 하셨단다. 영호가 해마다 아버지도 아닌 나를 찾아와 몇 십만원씩 용돈을 주는 것은 질부가 시켜서 한 일이다. 착한 질부가 있어서 아버지 살아생전에 오랫동안 소리없이 병구완을 잘 하더니 이제 당숙인 나한테까지 아버지 대하듯 잘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남편내조와 아들도 잘 키워 출세시켰으니 우리 집안에 큰 효부라고 아낌없이 칭찬을 하셨단다. 아내가 “저는 남편이 하는 것 따라주기만 했다”고 답해도 안 봐도 다 아신다며 계속 추켜 주셨단다. 나이에 관계없이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더 잘 하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마음공부 많이 하신 당숙덕분에 나까지 기분 좋았다.
마침 당숙에게 보은할 기회가 생겼다. 임실에 사는 당숙 아들이 꼭 사고 싶은 집이 임실읍내에 나왔는데 대출을 받아도 모자란 금액 2천만원을 못 구해 쩔쩔매는 것을 안 내가 자진해서 이자없이 돈을 빌려주겠다고 해서 거래를 성사시켰고 그 후 집값도 올라 기분좋게 잘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당숙이 몇 년 전에 노환으로 돌아가셔서 고향에 가도 산소 말고는 갈 곳이 없어서 너무나 섭섭하다. 다정하신 모습 다시 뵙고 싶다.

 

6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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