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는 것만큼 비우는 일도 어렵다. 얻는 과정에 드는 수고와 노력도 힘겹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애써서 모아 놓은 것을 내치거나 버리기는 더욱 힘들고 난감하다. 쌓은 재물도 그렇고 획득한 명성도 그렇다. 물론 마음에 낀 묵은 티끌은 더구나 떨치기가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노자는, 학문을 하는 것은 날로 더하는 것이고 도를 행하는 것은 날마다 더는 것이며 덜어내고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에 이르면 이로써 이루지 못할 것이 없게 된다고 했다. 학문은 앎을 무한히 늘리고 지식을 무한정 축적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만 도의 수행은 앎을 버리고 지식을 내려 놓는데 그 가치가 있다. 따라서 도의 완성은 어떤 목표나 성과도 성취 가능한 절대 경지에 도달하게 한다. 하지만 재물이든 욕심이든 가진 게 너무 많은 인간들에게 그 도의 달성은 요원할 뿐이다.
외로움을 온전히 이겨내고 가난을 완전히 극복했노라고 자부하는, 스스로 더 이상의 보시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청세가 스승인 조산 화상에게 보시를 받고 싶다고 농을 쳤다. 위태로운 시비를 걸어 스승의 반응을 은근슬쩍 떠 본 것이다. 아마도 스승의 실력에 대들어보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이에 조산이, 청원의 백가주를 석 잔이나 들이키고도 입술을 적시지 못했다고 하느냐고 응수했다. 선禪이라는 최고의 술을 이미 실컷 마셔놓고 무엇을 더 원하느냐는 말에 다름 아니다. 결국 창세는 스승의 실력을 넘어서지 못하고 머쓱하게 물러서고 말았다.
조산은 청세가 이미 공력이 완성되었음을 눈치채고 면박을 준 것이다. 가짜가 각종 형식을 이용해 가면을 쓰고 분장을 일삼으며 진짜처럼 보이려고 허세를 부려도 예컨대 진짜 부자는 자신의 부에 대해 자랑하거나 으쓱대지 않는다. 마치 아무것도 짊어지고 있지 않다면 어떤 것도 짊어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조차 없듯이 말이다. 물론 부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진짜 불행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도 자신의 고통이나 빈곤을 떠벌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죽고 싶다는 말은 여전히 살고 싶다는 간절한 호소며 솔직한 자기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진실은 겉으로 노출되기를 꺼리며 만천하에 밝혀지기를 주저하는 법이다.
청세가 마신 술이란 기실 빈곤을 만족으로, 분노를 용서로, 원망을 감사로 바꾸게 한 심성 회복제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런 마음에는 왜곡된 욕망이나 비틀린 사심이 존재할 수 없으며 맹렬한 분별심이나 교활한 이중성이 자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런 불성佛性을 밖에서 얻으려 자기 주변을 배회하며 뜻 모를 불경佛經에 매달리기도 한다. 땅에서 쌓는 돌탑은 간절한 기도의 마음을 담고 솟지만 하늘에서 보이는 돌탑은 온전한 비움의 마음을 담아 철침만 남긴다. 덜고 덜어 남겨진 그 철침이 지향하는 곳은 바로 나의 세찬 고집과 거친 편견이 제거된 텅 빈 세계이다. 기도는 모자람을 채우고 세속적인 바람을 이루려는 이기적 행위가 아니라 과욕을 경계하고 넘침을 덜며 청정한 본성을 찾으려는 성찰적 과정이어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마음의 바탕인 심전心田은 방치하면 악이 횡행하고 죄가 야기되지만 이를 계발하면 반듯한 양심이 양성되고 넉넉한 혜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가난으로 굴곡진 거친 사바세계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청세의 성화에 조산은 그 절망과 고통이 스스로의 무명無明으로 인한 자승자박임을 일렀다. 천만 죄복의 얻음이 오직 이 심전 계발의 성사 여부로 말미암는다는 점을 간곡히 이르신 대종사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따른다면 어느새 백가주에 흠뻑 취한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다.
7월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