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화100년 기념 서울성적지 연구보고 다섯 번째 ] 북악산 약수터와 진리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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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화100년 기념 서울성적지 연구보고 다섯 번째 ] 북악산 약수터와 진리신앙
  • 한울안신문
  • 승인 2024.08.21 20:56
  • 호수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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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산 방길튼 안산국제교당 교무

융타원 김영신 선진(先進)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전신) 2학년 때 경성 8개교 가을연합운동회 학교육상대표로 출전해서 선두로 들어오다가 뒤따라오던 선수에게 밀치어 오른쪽 얼굴이 뭉그러진다. 이에 세브란스병원에서 광대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으나 다시 급성뇌막염으로 진행되어 수술해야 하는데 죽을 수 있다하여 거부한다. 그러나 갈수록 광대뼈와 잇몸이 곪아간다. 김영신은 고통을 잊기 위해 관음주를 읊던 어느 날 북악산 골짜기에 감로수를 붓고 있는 관세음보살을 목도(目睹) 한다. 
김영신은 어머니 이성각에게 부탁하여 관세음보살이 감로수를 부은 곳에서 약수를 구해 이 물을 마시고 이 물로 밥해 먹고 얼굴을 씻고 하여 고름이 아물게 된다.
이 이야기는 1924년 7월 〈불교〉지 창간호 ‘염피관음력(念彼觀音力)으로 병 낫고 목숨이어’와 『구도역정기』의 김영신 법사편에 실린다.

1. 관세음보살 목도지, 김영신 외가
김영신이 관음보살을 목도했던 곳은 『구도역정기』의 “이때는 간동(외갓집)으로 옮겨 살았는데”와 〈불교〉지 창간호의 “23세 청춘으로 가장 김 모某(영환)를 황천으로 전송하고 오직 딸형제를 데리고 살기가 어려워서 자기의 친정 오라버니댁 간동 117번지 이진영씨의 뒷방채에 부쳐있는 병술생(丙戌生, 1886) 이씨 원각화(圓覺華, 이성각의 불명)” 기사에서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이성각·김영신 모녀는 간동 117번지의 뒷방채에 의탁해 있었다. 그곳은 이성각의 오라버니 이진영의 집으로, 경복궁 건너편 옛 ‘서울 시민선방’(사간동 108) 옆이다. 
김영신은 이 체험 몇 달 뒤 모친 이성각을 따라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된다(1924.음10.28). 이후 소태산에게 이 사건을 말씀드리자 “누구든지 일심을 모으면 그런 신통이 생기는 것이다”며 심상히 여기신다. 이성각과 김영신 모녀는 관세음보살이 감로수를 부은 약수터에 소태산을 모시고 가서 약수로 밥을 지어 산신령과 관세음보살께 올리고 절을 하려 하자 “절할 것까지는 없다”고 엄하게 말린다. 모녀는 이후로 우상을 모시고 절하지 않는다(『구도역정기』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 
소태산은 이성각·김영신 모녀에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는 신통한 현상(이적)에 끌려가지 말고 관세음보살을 드러내는 일심의 진면목을 직면하는 진리신앙과 사실신앙으로 전환시킨다. 
〈불교〉지에 따르면 김영신의 발병시기는 1924년 초라면 상처가 아문 때는 1924년 늦봄(음4.8) 무렵이며, 소태산과 북악산 약수터를 방문했던 때는 입교 일자를 미루어 보아 1925년 초반으로 여겨진다.

2. 소태산 방문지, 북악산 약수터 
〈불교〉지에 따르면 김영신의 모친 이성각이 삼청동 성제정(星祭井) 뒷산에 올라 감로수를 찾다가 정상 아래에서 약수가 솟는 석벽을 발견한다. 
“한번은 내게 현몽하기를 순득(김영신의 호적명)이 병을 고치려거든 삼청동(三淸洞) 성제 우물 뒤에 절이 있으니 그 절 뒤로 저 위에 올라가면 석벽 사이에 물이 있을 터이니 그것이 감로수(甘露水)다. 그 물을 갖다 먹이면 나으리라 하시기에 … . 약수가 나는 데는 관세음보살의 왼편 액하(腋下, 겨드랑이)이지요, 검은 바윗돌이 어덕어덕하고 터벅터벅한 고송(古松)이 쫑긋쫑긋 서 있는 북악산을 가리키며 보라고 한다.”(〈불교〉지 창간호)
즉, 김영신이 사간동 외삼촌댁에서 북악산 계곡에 감로수를 붓고 있는 관세음보살을 목도하였고, 이성각은 이 약수터를 찾아 발견하였으며, 이곳에 소태산을 모시고 간 것이다. 이성각은 북악산 약수터 위치를 관세음보살 왼편 겨드랑이 부분이라고 비유한다. 

지금도 성제 우물 인근의 칠보사 뒤편 바위틈에서 약수가 흘러나오며, 그 위쪽으로 계곡이 이어져 있고, 이 계곡을 따라 산 정상 쪽에 물때가 깃든 웅장한 바위봉우리로 솟아 있다. 이 일대에서 이성각은 풀잎으로 흠대를 만들어 약수를 받았던 것이다(『구도역정기』 김영신 편).
  북악산 약수터에 관한 일화 한편이다.
“정작 병이 나은 뒤 전혀 뜻밖의 엉뚱한 일이 생겼다. 북악산 약수로 병이 치유되었다는 소문이 온 장안에 퍼지기 시작하여 내노라 하는 양반은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산에 오르는가 하면 연일 약수터를 찾는 사람으로 장사진을 쳤고, 덩달아 장사꾼들도 성시를 이루었다.”(『구도역정기』 김영신 편)
북악산 약수터는 4명이 메는 사인교로도 갈 수 있고 험한 바위봉우리 일대는 도보로 올랐을 것이다. 이 길은 김영신의 외삼촌댁(사간동 117번지)에서 삼청동천을 거슬러 올라 성제정과 칠보사 뒤편 너머의 삼청동에서 북악산에 오르는 일명 ‘만세동방 계곡’에 이르는 루트로, 이곳 바위봉우리 석벽에서 약수를 발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8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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