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천상회(順泉商會)
순천상회는 팔타원 황정신행(온순)이 익산총부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보고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사업의 일환이다. ( 『황온순. 천성을 받들어 90년』 )
“온순은 1937년 8월, 종로 보신각 앞의 주단 포목점을 하나 사들였다. … 온순은 장소를 조금 옮겨 주단 포목점 순천상회를 차렸다. 3층 건물에 대지는 25평, 건평은 66평이었다.”(앞의 책)
처음 인수한 주단 포목점을 인근으로 옮겨 개업한 순천상회는 ‘경성부 종로 2정목 101번지’이다(출처: 경성일보 1940년 10월 13일자, 조선신문 1940년 10월 13일자 기사).
황정신행의 남편 강익하는 1941년 10월 1일자 〈조광〉지에 ‘소비층의 심부름꾼; 우리들의 신상도(新商道)’라는 글을 ‘순천상회주(順泉商會主) 강익하’로 기고한다. (사진1)
보신각(파란원) 옆 순천상회는 현재 종각역4번출구(노랑원)와 9번출구 사이 ‘종로구 종로 60, 60-1번지’와 그 앞 보도(步道) 일대(빨간원)로 여겨진다. (사진2)
황정신행은 보육교사 출신으로 유치원을 운영한 경력으로 학부모들이 많이 찾아왔다. 이 인연들을 잘 관리하여 자녀 혼수용 등으로 매상을 올렸던 것이다.
이 매상은 일원회상의 수달장자요 대호법의 문열이인 황정신행의 무상보시 자원으로, 경성지부와 익산총부에 희사한 것도 순천상회에 근거한 것이다. 소태산은 이러한 황정신행의 활동을 공익사업으로 확대되도록 지도한다. 정신행(淨信行)이란 법명에는 상없는 청정한 신용을 행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소태산은 종로에 볼 일이 있을 때 몇 차례 순천상회에 방문했다고 제자들은 말한다. 순천상회 앞에 전차 정류장이 있었기에 내왕이 수월했던 것이다.
또한 소태산이 구입한 경종(좌종)과 목탁도 순천상회의 지원에 따른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28년(1943) 3월 29일(음 3.2)부터 4월 11일(음 3.15) 사이에 경성과 개성을 마지막으로 순행한다. 이 무렵 황정신행이 와서 인사드리며 여쭈었다.
“어찌 아무 소식도 없이 갑자기 오셨나요?” / “목탁과 경종을 사려고 왔다.” / “제가 알아볼까요?” / “그려, 내가 정신행 믿고 왔지.” (황정신행 구술, 『금강산의 주인되라』 )
이에 황정신행은 자신의 승용차로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가서 목탁과 경종을 구입한다.
이때 구입한 경종과 목탁은 몇 개월 후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발인식에 사용되었고 이후 의식도구로 정착된다. 이로보아 순천상회는 법요도구 구입의 후원처라 할 것이다. (사진3)
2. 화신백화점(和信百貨店)
순천상회 앞 도로 건너편에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화신백화점은 1935년 화재로 소실되어 1937년 11월에 지하 1층 지상 6층과 옥상이 있는 건물로 신축한다. 평안도 출신의 거상 박흥식이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시설을 갖춘 건물로 지어 서울의 명물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보신각 일대가 조선인 상가의 중심지가 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25년(1940) 일제(日帝)의 황도불교(皇道佛敎) 정책에 따라 도일(渡日)하여 일왕에게 충성을 표하라는 강요를 받는다. 몇 번을 연기하다가 상경하여 화신백화점에서 국방색의 국민복과 군모를 지어 입고 사진까지 찍는(5월12일) 액션을 취한다.
이후 원기25년(1940) 10월 도일하기 위해 부산에 가나 안질을 발생시킨다. 안질치료를 이유로 도일을 미루는 동안 총독부는 혹여 전염과 민족의식이 발생할지 염려하여 도일 계획을 취소시킨다.
( 『대종경선외록』 교단수난장 14절)
이처럼 화신백화점은 일제의 탄압에 순종하는 듯하면서도 끝내 그 강요에 비타협 비협조하는 약자로서 강자를 대하는 소태산의 방편과 지혜가 스며있는 곳이다.
화신백화점 4층에 신사양복 및 가봉실과 재단실이 있으므로 이곳에서 국민복을 맞춰 입고 옥상의 사진실에서 사진촬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사라진 종로의 랜드마크 화신백화점』 )
-방길튼·박혜현·윤지승 공동연구-
10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