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는 이리(익산)에서 경성(서울)을 내왕할 때 기차를 이용했고, 경성역에서 경성출장소 창신동회관과 경성지부 돈암동회관을 내왕할 때 전차와 버스를 이용한다. 그러던 중 경성에서 익산총부로 돌아갈 때 비행기를 한차례 이용한다.
원기21년(1936) 여름에 임칠보화는 남부민 지부장 박허주와 같이 울산비행장에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비행기 탑승을 시도했으나 마침 쉬는 날이라 무산된다. 그러다가 원기27년(1942) 5월 박창기가 여의도비행장에서 이리행 비행을 주선한다. 소태산의 첫 비행기 탑승이다.
여의도비행장은 대규모 확장 공사를 거쳐 1929년 4월 1일 ‘경성비행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한다. 대합실, 격납고, 수리소, 석유고, 풍향표식기 등의 시설을 갖추었고 노량진까지 자동차 도로로 연결하였으며 1933년 증축 공사 때는 야간 조명탑을 시설한다(자료: 국립항공박물관).
경성지부 돈암동회관에서 여의도비행장으로 가는 노정은 소공동(조선호텔 인근, 시청 옆)에서 여의도비행장까지 운행하는 셔틀 승합자동차(버스)를 이용했을 것이며(출처: 조선일보 1936.10.13. 경성이리정기항공 13일부터 개통), 또는 ‘삼선교’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4가’에서 환승하여 한강교를 건너 ‘노량진역’ 앞에서 하차한 후 버스로 환승하여 ‘비행장입구’ 정류장에서 내려 샛강 다리를 지나 여의도비행장 대합실까지 이동했을 것이다.
자동차로 경성역에서 약20분, 영등포역에서 약5분, 비행장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도보로 약15분 걸린다(출처: 1929년 조선총독부 관보).
여의도비행장은 활주로 2개가 X자형으로 있었다. KT여의도타워와 FKI타워(여의도전경련회관)에서 브라이튼 여의도아파트(옛 MBC방송국)을 잇는 남북방향의 주활주로(540m)와 여의도역 2번 출구 서쪽 한국투자증권빌딩(한국투자금융지주)에서 중소기업중앙회를 잇는 동서방향의 보조활주로(400m)가 있었다. 비행장 사무실과 격납고는 윤중로(가을단풍길)를 따라 남쪽 샛강 변에 위치해 있었고 '비행장입구' 버스정류장은 샛강 건너 노들길 쪽에 있었다. 소태산은 주활주로를 따라 첫 비행한다.
1936년 신용욱은 조선항공사업주식회사(愼항공회사)를 설립하여 경성~이리간 주1회 정기운항을 시작한다. 1938년 광주까지 연장 운행하며 운항 횟수도 주 3회(화, 목, 토)로 늘린다(출처: 조선일보 1939.11.16. 광주비행장).
경성~이리 구간은 편도 15원에서 12원(열차 2등칸 수준)으로 내리고, 광주 노선 취항을 위해 당시 최신 기종인 미국 비치크래프트사(社) 경비행기를 구매한다(출처: 일제강점기 언론에 비친 '京城'이야기』, 조선민간항공개척자 신용욱).
경성-이리-광주 노선은 민간항공 愼항공사업사가 단독 운영한 노선으로, 소태산은 박창기와 함께 일본군인 3명과 동승한다. 오전 11시발 ‘경성-이리’발에 탑승하여 12시경에 이리비행장에 도착한다(출처: 조선일보 1938.9.30 광주 경성 간).
연도 |
구간 |
요금 |
오늘날 기준 |
1936년 |
경성-이리 |
15원 |
229,500원 |
1939년 |
경성-광주 |
18원 |
275,400원 |
원기27년(1942) 5월에 박창기는 여의도비행장에서 이리비행장까지 소태산 대종사를 비행기로 모신다. 이리비행장은 구만창(김제시 공덕면 저산리 동자마을)에 있었고 일명 목천포비행장이라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비행기 탑승감상담을 원기27년(1942) 5월 16일 익산총부 예회에서 대각전에 모인 대중에게 설법한다, 이를 「굳은 신념은 위대한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이공주가 수필(受筆)한다(구타원 이공주 종사 법문집 1, 『일원상을 모본하라』)
“지난번 경성 갔을 때 창기가 비행기로 귀관(歸館)하자고 권하기에 응낙하고 모든 행장을 챙긴 후 비행장으로 나가서 생전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 나는 창기와 마주 앉고 우리 옆에는 일본군인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점차로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하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공중으로 올라가는데 밑을 내려다 본 즉 마치 큰 소쿠리 속에 앉은 것 같더라.”
소태산은 비행기 탑승 후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해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큰 소쿠리에 앉은 것 같다며 솜으로 귀를 막고 작은 노트에 필담으로 박창기와 소통한다.
소태산은 기차를 탈 때면 ‘이 기차가 종점까지 무사히 가길’ 심고하듯이 비행기 탑승 시에도 ‘심고’를 올렸던 것이다. <결정될 심고>을 제시한다. 즉 『정전』 ‘심고와 기도’에서 「결정하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는 결정될 심고와 혹은 설명기도를 올리라」고 한다.
“ … 나는 사은(四恩) 전에 정심(正心)으로 심고를 드린 후, 반드시 무사통과케 되리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서 고요히 눈을 감고 선정(禪定)에 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도중에 어떠한 고장이 생겨서 설사 떨어져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절대 거기에는 망동하거나 원망치 않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였더니, 더욱 마음이 안정되더라.”
소태산은 첫 비행탑승이라는 불안한 상황을 당해 사은 전에 무사하게 비행되리라는 굳은 신념을 갖고 설사 사고가 발생할지라도 정상에서 벗어난 망령된 행동을 하거나 원망도 하지 않겠다는 각오의 심고를 한다. 이렇게 결심하는 심고를 올리어 마음의 안정을 확보한 것이다.
이어서 <결정될 심고>의 공덕을 구체적으로 부연한다.
“대개 무슨 일이나 처음 시작할 때, 즉 결정을 하기 전에는 뇌수가 복잡하고 따라서 ‘어찌할 것인고?’ 하여 염려가 되지마는 한 번 정의(正義)의 굳은 신심을 가지고 작정(作定)이 된 이상에는 근심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으며, 설사 불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근심이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구채(舊債: 묵은 빚)를 갚아버린 것 같은 통쾌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군(諸君)도 매일매일 천만경계를 접촉할 때에 경거망동하지 말고, 항상 정의 도덕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진행한다면 자연 안심안정(安心安靜)이 되는 동시에 고통과 공포도 없어지고 따라서 마음이 태연자약하여 비겁한 행동이 없나니, 정의의 굳은 신념은 위대한 것이니라.”
정의의 굳은 신심으로 작정하는 결정될 심고를 올리면 근심이나 두려움이 없게 되고 묵은 빚을 갚아버리는 통쾌함도 얻게 된다. 정의 도덕의 신념에 따라 결심하는 결정될 심고를 올리면 안심안정이 되는 동시에 태연자약해져 특히 비겁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되어 정정당당해 지는 것이다. 이처럼 여의도비행장 활주로는 결정될 심고의 현장이다.
11월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