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시작하거나 마무리 할 때 예전에는 만년필을 선물하곤 했었다.
만년필은 아주 불편한 필기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용자에 맞춰 변해가는 필기감은 어떠한 필기구도 줄 수 없다. 오랫동안 사용한 가죽 제품은 손에 길이 들어 광택과 색감의 깊이가 더해가는 것처럼, 만년필도 몇 년 이상 오래 꾸준히 사용하다 보면, 닙(펜촉)이 사용자의 필압 등 필기습관에 맞게 길들여진다. 사용할수록 자기 자신이 쓰는 필기 자세에 따라 닙이 미세하게 휘고 깎여 나가면서 갈수록 부드러워지기 때문에 쓰면 쓸수록 세상에 하나뿐인 자기만의 만년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만년필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희열이라고 할 정도다. 사실 만년필은 장점보다 불편한 점이 훨씬 많은 펜이다. 큰 단점은, 비싸다. 저가형 양산형 펜들이 차고 넘치는 시장에서, 만년필은 가성비 면에서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게다가 볼펜과는 달리 잉크의 소모가 심하기 때문에, 잉크 값도 추가로 들뿐만 아니라 종이의 질도 중요시하는 까다로운 필기구다.
그러나 장점이라면 볼을 굴려 잉크를 내는 볼펜이나 흑연을 마모시켜 글씨를 쓰는 연필에 비하면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잉크를 종이에 흡수시켜 쓰므로 손과 손목의 피로감이 훨씬 덜하고 글씨 쓸 때 불필요한 힘을 빼고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다.
만년필 길들이는 과정은 흡사 원불교에서 내 마음을 찾아 길들이는 과정과 같다. 몸에 맞지않아 불편하기만 했던 좌선이나 염불을 비롯하여 탐진치에 가려진 마음을 닦아내는 과정도 그러하다. 숙련되지 못할 때는 잉크가 만년필 밖으로 흘러나오거나 조심을 한다고 해도 손가락 끝 마디마디에 나도 모르게 묻어있는 걸 발견 할 때의 좌절이란….
세상에 하나뿐인 내 온전한 마음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은 희열이고 기쁨이고 감사다.
만년필 하나를 자유자재로 길들일 때도 다년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탐진치로 점철되어진 우리 마음을 길들이는 데는 오죽하랴.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원기 109년도에는 참회의 기도로써 내마음을 살펴 어느 부분에서 잉크가 나도 모르게 새고 있지는 않는지 체크해 볼 일이다.
설령 잉크가 새도 괜찮다. 닦으면 되니까. 그러나 잉크가 새고있는 줄을 모른다면 닦는 선에서 정리되지 않는다. 소중한 필통이나 가방을 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잘 챙겨볼 일이다.
12월 13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