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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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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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 기자의 단어 너머 세상



흥얼거리는 콧노래, 말보다 먼저 짓는 미소, 모스크바공항, 요정은 그렇게 내게 왔다. 누더기같은 옷에 천들을 덧대 만든 가방을 길게 맨, 뉴질랜드에서 온 그녀는 자기를 ‘Fairy(요정)’라 소개하며, 사막과 인도를 여행하고 핀란드로 가기 위해 암스텔담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라 했다. 시간을 물으러 요정은 손에 들고 있던 터무니없이 큰 워커 속에 발을 넣고 뒤뚱뒤뚱 공항을 누비고 있었다.


언제까지 여행할거냐는 질문에 ‘바람이 멈추라할 때까지’라고 답하는 그녀는 말하자면 갈수록 태산이었…으나, 농담이라기엔 뭔가 진지하고 생경했다. 15시간 대기의 절반쯤을 겨우 버틴 나는 작정하고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보통 숲이나 강가에 침낭이나 해먹을 치고 자며, 이른 아침 과일을 따고 이슬을 모은다. 비행기나 배를 제외한 육로이동은 대부분 히치하이킹. (당연히) 채식주의자지만 이따금 달걀과 우유를 먹기도 하는 이 요정의 고민은 ‘도무지 초콜릿과 벌꿀을 끊지 못하겠다는 것’.


당신, 요술막대기도 있겠군요, 라고 했더니 고민하던 요정이 느릿느릿 가방을 뒤져 주머니를 연다. 밟아온 땅들의 영혼이 담긴, 뭔가 영롱하고 남다르지만, 그래봤자 돌맹이들을 보여주던 그녀가 문득 꺼내놓는 아프리카 전통악기 카림바.


딱히 가사라곤 없는, 그저 새들이 지저귀는 듯, 자연이 인간을 감싸안듯,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소리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모스크바공항의 늦은 오후, 또각대는 구둣발과 떠드는 아이들이 순식간에 요정에게 모여들었다. 뭔가 불공정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인 순간,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진짜 요정임을, 이 여행후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깨달았다.


비행기에 오르며 요정은 다시 워커 속으로 들어갔다. 오렌지 두조각을 나눠먹으며 우리는 이별했다. 요정이 사라지고 나는 아주 천천히 걸었고, 꽤 여러번 시간과 게이트를 물으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라는 말에 당신에게는 괜찮아요, 느낄 수 있어요, 라며 허락해준, 믿고 느끼는 것이 가장 위대한 것임을 일러준 요정의 뒤뚱거리는 뒷모습. 그것이 이 아름다운 여행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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