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타지 않는 부처
상태바
불에 타지 않는 부처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12.29 0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43

「금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며, 진흙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 참 부처는 안에 앉아있다.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은 허물이 없으리니, 꿈같고 허깨비 같은 허공 꽃을 무어라 붙들려 애쓰는가. 이미 밖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닌데 다시 무엇에 매일 것이랴. 부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면 마음을 병들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가장 고치기가 어렵다.」《趙州錄》



우리 불자들에게 깊은 깨우침을 주는 옛 조사(祖師)들의 가르침이 많은데, 그 중 조주(趙州: 778-897)스님의 위 법문도 불법의 참 뜻을 퍽 쉬운 표현으로 대중들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하셨습니다. 이는 일체 모든 중생이 고해(苦海)를 벗어나 해탈의 저 언덕[彼岸]에 이를 수 있다[成佛]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과 같이 과거 많은 조사들이 깊은 수행정진으로 마침내 불법의 참뜻을 깨친 뒤에, 부처님의 이 법문을 새삼 확인하는 말씀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하지만 자기마음의 본질(본바탕)을 깨닫지 못하면 부처님과 조사들의 그런 진실한 가르침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가신 뒤 2500년 지난 지금도, 부처님 모습으로 만든 조각 앞에서 정성스레 신앙을 바치는 것을 아무도 어리석다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1100여 년 전의 조주스님은 대중들에게 위와 같이 일러 깨우쳐주었습니다. 대체, 불에 녹거나 타는 부처님, 물에 씻겨 없어질 수 있는 부처님[佛像]이 그 무슨 중생을 건지는 영험(靈驗)이 있겠습니까. 진짜 부처님[眞佛]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 눈으로 보아도 참으로 진리적이고 과학적인 법문입니다.


우리 원불교는 개교표어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입니다. 그리고 교리도(敎理圖)에도 일원상그림 밑에 ‘일원은 일체중생의 본성’이라고 못박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네가 곧 너의 조물주니라’하셨던 법문에 비춰보아도, 저 물질로써 만들어진 상징적 조각상들이 우리에게 복을 내리고 지혜를 줄 리 없다는 것은 상식만으로도 알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불상에 절을 하면서도 자기 불성(佛性)을 알려는 사람은 드물고, 일원상을 앞에 두고도 자기의 본성마음을 깨치려는 교도는 적은 듯합니다.


앞으로 3년 남짓이면 교단창립 100주년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아직도 물질에 기대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교조의 이상(理想)을 세상에 말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밖으로 세계인류교화를 선포하고 일원세계건설을 말하기에 앞서, 저 세계인들이 눈여겨볼 우리 일원상이 과연 무엇인지부터 내가 참으로 아는 게 먼저입니다. 진리의 상징인 저 일원상은 ‘나’와 떨어져있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으며 내가 ‘사용하고’ 있는 ‘내 안의 참 부처’임을 바로 알고, 반드시 이에 바탕하여 참다운 불공(佛供)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나를 제도하고 세상을 교화하는 첫걸음입니다.



「내 절 부처를 내가 잘 위하여야 남이 위한다는 말이 있나니, 자신에게 갊아 있는 부처를 발견하여 정성들여 불공하라. 불공에는 자기불공과 상대불공이 있는 바, 이 두 가지가 쌍전하여야 하지마는 주종을 말하자면 자기불공이 근본이 되나니, 각자의 마음공부를 먼저 하는 것은 곧 불공하는 공식을 배우는 것이니라.」(법어 권도편 13장)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