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이 터질 것 같은 추위 참 오랜만이다.
1월 1일, 영산성지에서 새벽타종을 마치고, 그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을 받으며, 앞사람이 내어 놓은 발자국에 의지해 16명의 법동지들이 삼밭재를 오른다. 주위는 깜깜할 뿐 흰 눈만 소복소복 내리고, 세상은 흑과 백 둘 뿐이다.
매일같이 내리고, 얼어붙고 했던 눈 덕분에 이미 산길은 눈길이다. 바로 전날 20㎞ ‘탈핵, 생명평화순례’를 마친 내 다리는 이미 묵직해져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밭에서 시작부터 지쳐있었다.
“오메 20㎞ 순례가 백번 낫당께~ 야간산행이구만... ㅜ.ㅜ” 거칠게 내뿜는 내 숨소리가 가여웠는지 앞서 가던 법정 깊은 친구 연화가 손을 내민다. 한 손에 의지해 겨우 한 걸음 한 걸음 떼다보니, 친구의 한손이 어찌나 위안이 되고 큰 힘이 되던지, ‘합력(合力)’하라고 내려주신 신년법문을 새삼 떠올린다. 이젠 제법, 앞서가던 연옥이 노랫소리도 들리고 가만히 따라도 부른다.
서울 한강이 얼어붙고, 한강 한 켠에 만국기와 함께 개장된 얼음위에서 스케이트를 지치던(적어도 썰매 타던 세대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린 날에나 맛보았던 강바닥 추위가 새삼 추억으로 돋는걸 보니, 제법 올라왔나 보다. 먼저 도착한 일행의 들뜬 목소리가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린다.
“저 고개만 넘으면, 저 대나무 숲만 지나면 샘이 있고 시원하게 물을 마시리라, 그리고 흰 눈에 털썩 누워버려야지.” 하는데 눈앞에 삼밭재 법당이 불쑥 나타난다. 희다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나무와 하늘과 땅들이 너른 품으로 맞이한다.
“하악 하악~! 너무 좋다. 감사합니다. 법신불 사은님, 대종사님.” 그저 이 말 밖에는, 검박한 삼밭재 법당에서 소박하고 절박한 기도를 올린다.
“천지자연 안에서 인간이 교만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주소서. 그 안에서 덕성 넘치는 사람들이 인정스럽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렵니다. 매주 올리는 탈핵, 생명평화의 기도가 인간의 탐욕 앞에 무릎 꿇지 않게 함께 하소서.”
기도를 마치고 차분히 마주한 천지 자연 앞에서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이대로만, 더 이상 망가지지 않길, 이번 추위가 이상 기후로 인한 혹한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질서일뿐이길 나도 모르게 자꾸 혼잣말을 한다.
매주, 영광읍에서 홍농원전앞까지 걷는 우리들에게 “왜 걷느냐?”고 묻는이가 있다. 내 대답은 ‘대참회’이다. 흰눈에 덮여버린 자연앞에 다른 답이 있을리 없다.
“인간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천지자연의 관계에 있어서도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될 매우 중요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원천인 천지자연을 인간중심의 개발 대상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커다란 재앙에 직면해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자연을 상생의 관계, 은혜의 관계로 대전환해야 하겠습니다.”
삼밭재에서 새해아침, 곱씹어본 신년법문은 올 한해 궁글리고 궁글릴 공부꺼리가 많음을 짐작케 한다. 그나저나 영산사무소 식당의 떡국은 왜 이렇게 맛날까? 감사하고 은혜로운 시작,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