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검도 애호가이다. 검도가 무척 공격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렇지 않다. 가령 상대공격에 대한 방어를 준비하면서도,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공격을 위해 기회와 선택을 해야 하는 ‘기다림’의 운동이다. 특히 호구(검도용 마스크)착용으로 상대의 눈과 표정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어서, 단지 검의 움직임과 스텝(발동작)만을 보고 파악해야 하는 ‘신중함’의 운동이다. 때문에 스스로가 시기적절할 때를 알아야 하고, 그때를 기다리기까지 정신과 마음을 잘 조절해야 한다.
조선 후기 기묘사화(1519년)로 조정은 연이은 숙청으로 인하여 당파들의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권력에 눈이 멀었던 훈구파와 개혁이라는 가증의 탈을 썼던 사림파 간에 당쟁은 인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러한 난세 속에, 한국 철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이 대집성된다. 그중 단연 독보적인 학자, ‘퇴계 이황’이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런데 역사학계에서는 그의 사상적 업적과는 달리, 그를 ‘정치의 패배자’, 또는 ‘정치의 소심자’라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의 형인 온계 이해(李瀣, 1496년~1550년)가 사화로 죽음을 맞이하자, 퇴계는 한양을 떠나 안동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던 ‘재야의 학자’, ‘가난한 선비’ 등의 수식어와는 달리, 실제로 그는 몇백 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소유했던 땅과 거택도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가 정치계를 벗어나고자 고향에 도망쳤던 인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인문학교인 서원을 세워 개설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젊은 선비들의 덕성을 길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후학들은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세를 이루었고 신망을 바탕으로 정적들을 제거해나갔다. 때문에 퇴계를 숨은 ‘마키아벨리’라고 한다(‘경향신문’, 퇴계 이황과 군주론, 2013년 10월 25일자). 말하자면 그의 정치적 태도는 ‘신중함’에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이 말에 동감하는 바이다.
이 책은 퇴계가 당대 최고의 멘토였던 고봉 기대승(1527~1572)과 함께 학문을 논하면서 주고받은 편지이다. 총명한 젊은 학도를 아끼는 노학자의 인품이나, 이에 앞서 노장의 학문을 사모하면서도 논(論)에 있어 체면 생각하지 않고 덤비는 소학자의 패기를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편지들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성품이다. 최대의 학술논쟁으로 이루어진 ‘사단칠정’의 논박도 그들에게는 기다림과 신중함 속에 ‘존중과 섬김’이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의 사유체제를 논하기 전, 도덕적 판단에 대한 근본 목적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고려해보면, 당쟁으로 얼룩진 사화와는 확연히 달랐음을 말해준다. 치졸한 판단과 경거망동한 권력만을 내세우고자 했던 것과는 달랐다. 오히려 편지라는 시·공간적 교류가 주는 두 사람의 우정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어떠한 세상이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봉래정사에서 자부의 불효를 탓하며 불상에게 불공하는 노부부에게, 소태산 대종사는 자기들의 자부가 곧 부처이니 산부처에게 부처님 모시듯 공경하여 ‘실지불공’할 것을 강조하였다(대종경 교의품 15장). 어쩌면 상대를 위한 공경도, 산부처를 위한 실지불공도, 본래 우리가 지닌 그 기다림과 신중함을 통해 서로의 신뢰로 뭉쳐 쌓아나갈 때, 표현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얼마 전 수능이 끝났다. 대한민국 고3과 부모들이 몇 년 동안을 가슴 조이며 보낸 그 수능이, 또다시 제도개편을 한다고 한다. 해방 이후 입시제도가 18번 바뀌었으니,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인지를 잘 모르겠다. 교단도 100주년에 맞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처럼 교헌개정을 가한다고 한다. 천주교에서 그 법을 준비하기까지, 단 3년 만에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다리고 신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존중하고 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서두르지 말고 그러나 쉬지도 말고’(괴테, 1749~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