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행복한 교당!’ - 생각만 해도 흐뭇해지는 우리들의 살 곳이 바로 우리교당이다. 항상 밝은 길을 가르쳐주는 스승과 또 뜻을 같이 하는 반가운 얼굴들이 있고, 언제나 삶의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자 믿음과 배움의 집이 바로 우리교당이다.
그런데, 교당을 찾아왔다가 서운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되돌리는 이웃들을 종종 본다고 한다.
‘행여나’ 하고 힘들게(?) 마음을 내어 찾아온 귀인(貴人)들을 오히려 실망을 안고 돌아서게 만들다니.
하여, 우리 모두가 보다 충실하게 수행정진하는 자세를 가다듬고 시대의 요구에 걸맞는 교화체제를 갖춘 역동적 교화주체로서의 면모와 비전을 제시하는 교당 만들기에 더욱 세심한 정성으로 분발해나가자는 진언(進言)들이었다. (지난 주 항단회 모임에서다.)
교당은 우리의 꿈과 염원이 담겨 있는 수행의 도량이자 제생의세의 포부와 이상을 펼쳐가는 교단(敎團)의 최일선 교화현장이다. 그런 만큼, 교당은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항상 열린 교화공간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원불교 - 그 자체’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교화현장의 사정들은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교당마다 형편이 다르기는 해도, 그 임무와 업무량에 비해 모든 여건(인력과 재정, 시설 등 인프라)이 너무나 열악하고 취약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교화의 꽃’은 잘 준비된 설법(說法)임을 누구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설법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현장교무들의 부담과 고충(苦衷)은 재언(再言)을 요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너무나 잡다하고 과중한 업무들로 하여 그 소중한 유소년과 청년- 젊은이들에 대한 교화는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교화현실은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건만, 아직도 이렇다 할 해결방책을 들어본 일이 없는 것 같아서 답답하기만 하다. 차라리 나의 과문(寡聞) 탓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만 말이다.
지금 교당교화는 사실상 거의 한계에 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중한 업무와 부족한 인력, 열악한 재정형편 등 시급한 선결과제의 해결 없이 다만 일선 교무들의 가없는 혈성(血誠)만을 담보로 교화활성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과욕 중의 과욕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갈수록 우려되고 있는 교화의 정체(停滯) 내지 부진현상은 자칫 최일선 교화주체인 교무들의 마지막 남은 의욕마저 꺾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갖게 한다.
지금 교단은 교단100년성업을 추진 중에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잠시만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핵심과제가 무엇인지를 돌아보자. 일에는 완급(緩急)이 있다. 그리고 우선순위가 있다. 보다 시급한 과제들을 제쳐두고 후일 진중하게 추진해도 좋을 ‘장엄(莊嚴)’같은 일에 너무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제는 좀 더 현실을 바로 보고 더 크게 우리의 의식(意識)과 사고의 틀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교당의 활성화 없는 교세발전은 기대할 수가 없다. 자칫, 때를 놓치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총부도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대해 환골탈퇴의 결단으로 확실한 대답을 해야 한다.
우리는, 살을 깎는 듯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던져 중생제도의 대 서원을 실천하는 우리 교무들을 언제까지나 저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 내쳐둘 수는 없다. 보다 진지하게 최소한의 기본적 교당교화 인프라의 확충과 시대상황에 걸맞는 합당한 지원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교당은 언제나 즐겁고 재미있고 유익하고 행복한 곳이어야 한다.
모두들 설레는 마음으로 교당을 찾게 해야 한다. 한 주(週)간 힘든 삶을 살면서 스러진 마음을 되잡고 새로운 삶의 지혜와 용기를 얻게 해주는 ‘잘 준비된 설법’과 정성스런 기도소리, 만나면 반가운 법동지들과의 정겨운 ‘담소(談笑)’들이 그대로 벅찬 감동으로 거듭나는 교당을 만들어가야 한다. 언제나 제생의세의 서원이 넘치는 그런 ‘즐겁고 행복한 교당’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