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꼴을 보고도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은 부처님 심법
12월이 한해를 마감한다면 1월은 교무들이 임지에서 떠나고 들어오는 송별과 이임이 시작되는 달이다. 인디언들은 1월을‘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이라고 한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인사이동 사령장을 받아 누구는 부산으로 누구는 제주도, 강화도 등 어디든 가방 하나 들고 정든 임지를 떠난다. 그게 교무들의 삶이고 교단 행사다. 가장 멋진 떠남은 노래가사처럼‘떠날 때는 말없이’가 가장 멋진 이임이 된다. 머물던 정(情)도 놓고 가야 흔적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근 한 달 동안 전화가 없던 교무가 답답한 듯 먼저 전화가 왔다. 당연히 누구누구는 어디로 발령을 받았다고 하고 거기에 걱정 겸 위로의 브리핑 전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통화가 끝날 즈음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우리 수도인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는 말들은 어찌 보면 상대에 대한 오픈된 설득력이다.
그 하나는 적어도 종교인의 마음은 알아도 모르는 체 해주어야 숲을 찾는 새들처럼 의지하게 되고 또 하나는 비록 화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무심히 참을 줄 알아야 수도인다운 모습을 보인다는 말이다. 듣고 보니 내 자신도 그런 마음심법으로 살았는가 하고 되돌아 봤다. 음 나보고 들으란 말이구나.
촉한의 마속이 제갈량에게 한 말, 공심위상 공성위하(攻心爲上攻城爲下)가 생각난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상책이 되고 비록 높은 성을 정복하더라 도 그건 하책이 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법문에서“남의 꼴을 잘 보는 사람이 진실로 큰 공부하는 사람이다.”남 꼴보기 싫어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꼴을 보고도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은 부처님 심법 아니면 할 수 없는 수행이다. 선배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일로 인해 사람이 마음 다쳐서는 안 된다. 마음이 상하여 서로 괴롭다면 그 어떤 잘한 일이라 해도 잘못된 일이다.
1930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경성(서울)에 불법연구회 지부를 설립하시고 몇몇 교도의 헌금으로 몇 칸의 작은 법당 집을 지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인 경성 지부장에게“지게로 이 짐을 경성역까지 옮겨라”하니 제자는“제가 지금 집 짓는 일꾼들을 부리는 중이라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하고 거역을 했다. 대종사는 다른 제자에게 짐을 져 옮긴 후 제자에게 다시 물었다.
“아까 그렇게 한 행동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이런 작은 짐 하나 옮기는 것도 체면을 차리니 앞으로 수많은 창피한 일이 생길 터인즉 그대는 견딜 수 있겠는가”하고 격노하였다. 제자는 그 자리에서 참회반성하고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겠다고 다짐을 하였고 다른 제자들도 어떤 일을 시키든 스승님의 말씀을 따랐다고 한다. 이 사건을 함지사지(陷地死地)라 한다. 함지는 지옥이고, 사지는 죽을 곳이다. 公道를 위해 죽을 곳이라 해도 가는 것이 순명정신이었다. 지금도 이 정신이 도가의 가품이 되었다.
글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30년 교단생활을 하며 내게도 떠나고 잊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시 만나지 못한 사람, 잊지 못한 사람과 잊지 못할 사람 또한 얼마나 있었던가. 모두가 은혜로운 시절 인연이었다. 떠나는 교무의 뒷모습에‘아쉽다’‘그립다’하는 여운과 향기가 남아 있으면 그는 참 멋진 교무일 것이다. 올해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으시고 불법을 펴신 지 100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