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종교의 교단현황을 들여다보면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혁신을 요구하는 진보성향과 보수성향 간의 긴장입니다. 일반적으로 진보성향이 교단 내의 구습을 개혁하려는 목소리를 높이고, 동시에 사회개혁에의 참여활동도 활발한 반면에 보수성향은 개인적인 수행을종교 본연의 것으로 강조합니다.
건강한 교단일수록 이 둘 사이에서 설득과 타협으로 느린 걸음이나마 성숙한 방법론을 이끌어내는 데 능숙합니다. 어느 쪽에도 힘의 편중됨이 없이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교단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실무를 맡은 쪽이 진보성향을 띤다면, 대표성을 갖는 쪽은 보수적,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이기도 하고, 이에 대한 역의 경우도 존재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힘의 균형, 시각의 균형입니다.
교단 내에서의 진보적 그리고 개혁적인 성향을 보이는 그룹은 대부분 사회의 변화에 민감한 편입니다. 사회가 교단에 요구하는 것, 그리고 사회의 아픈 부분을 찾아 종교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그것이 실질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사회 운동 차원에서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그룹은 원로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교단 내에서의 발언권도 강한 편입니다. 이 보수그룹은 자칫 진보적인 성향의 구성원들이 놓치기 쉬운 본질적 교의나 정체성을 지키는 데에 상대적으로 노력을 기울입니다. 간혹 보수그룹이 진보측과 사회참여의 의지가 일치할 때는 그 운동들에 교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해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컬러의 그룹에 대해 개인별로 호오(好惡)는 가능할지라도 시비나 선악, 정당성의 여부를 가리는 건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나름의 정당성과 명분을 가지고 한 교단을 지키고 이끌어가는 이원적 코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키려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결과에는 시비선악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진보적 그룹이 갖고 있는 에너지와 활동방향의 선명성이 교단 내 헤게모니 싸움으로 이어진다면 그 조직은 이내 분파로 나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활동력이 강한데다가, 시의적인 의제로 인해 대중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수적 그룹은 이미 교단 내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변화를 추동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오랫동안 젖어온 타성으로 인해 종교활동의 본질과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을 서로 착종하게 될 위험성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법이 아닌‘제도’를 본질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교단 운영상,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고, 또 이제까지 변화해왔던 시스템을 교조적인 것으로 집착하는 경향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힘을 가진 그룹인 보수 측이 이러한 성향을 보인다면 교단안에서는‘고인물’의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대내외적으로 불안하고 변화가 많은 시점이라면 그러한 수구적 부작용으로 인해 교단이 발전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외려 퇴보하는 결과를 낳게 될 위험도 큽니다.
진보와 보수의 겨루기 끝에 결국 교단이 머뭇거리고 다시 원래대로 주저앉는 결과가 나타났다면 양쪽 모두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자신의 자리를 돌아볼 필요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진보측은 보수성향의 원로들을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혹여 급격한 변화에 대한‘불안’이 최소한의 개혁의 의지와 필요성에 대한 자각마저 잠식시켜버린 것은 아닌지. 그리고, 보수측은 자신들이 변화를 거부해가며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 교단의 안정성이 아니라 일부 원로들의 ‘기득권’은 아닌지 냉철하게 되돌아 볼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가을이라, 하늘은 높고 푸르러 거울처럼 마음을 비추기에도 좋은 듯 합니다. 당장 교헌개정 전문위원이었던 저부터도 성찰의 나날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