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의 친동생으로서 새 회상 벽두에 형님과 소태산 대종사를 보필하여 교단 창업에 신심을 온통 불살라 원불교의 영원한 청년상이 되었던 주산 송도성은, 경북 성주에서 부친 송벽조 대희사와 모친 이운외 대희사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족 모두가 정산종사의 연원으로 영광 소태산 대종사 법하로 이사하여 송도성의 나이 13세 때 소태산 대종사를 뵈었다. 한번 뵙고 즉석에서 제자 되기를 청하였고, 이를 기특히 여긴 소태산 대종사께서 “네가 어떻게 그런 마음이 났느냐?”고 묻자 어린 송도성은 “부심자(夫心者)는 지광지대물(至廣至大物)이니 수련정신(修練精神)하여 확충기지대지심이이(擴充其至大之心而耳)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소태산 대종사 기뻐하며 “네가 도의 성품을 알았구나. 앞으로 도성(道性)이라 이름하거라” 하며 법명을 지어 주셨다.
송도성은 16세 때인 원기 7년, 형님 정산종사 연원으로 부안 변산에서 소태산 대종사께 “헌심영부 허신세계 상수법륜 영전불휴(獻心靈父 許身世界 常隨法輪 永轉不休 : 마음은 스승님께 드리고 몸은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껏 굴려 엉겁토록 쉬지 않게 하리라.)”라는 출가시를 바치고 전무출신을 시작했다.
원기 10년, 송도성은 약관 19세의 나이로 수위단원이 되었고, 이듬해 경성에 불법연구회 경성출장소가 설립되자 초대교무로 파견되어 경성 교화의 기틀을 다졌다. 송도성은 경성출장소 교무로 있으며 경성여학교에 재학 중인 김영신에게 전무출신을 권장하였다. 이는 교단 여자계의 전무출신 탄생의 계기가 되었고, 여성 성직자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원기 12년 봄 총부인사에 의해 송도성이 10개월 만에 총부 서무부 서기로 전입되어 송도성 교무의 형인 총부 연구부장 송규 교무가 제2대 교무에 임명되었다.
송도성의 나이 22세에 어른들의 뜻에 따라 소태산 대종사의 장녀 박길선과 결혼하였다. 결혼은 신정예법에 준하여 시행함으로써 검박함의 효시를 보였다. 송도성은 이로서 소태산 대종사의 애제자(愛弟子)이자 사위로서 소태산 대종사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보필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송도성, 송규 형제에 대하여 “내가 송규 형제를 만난 후 그들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 한 일과 두 번 시켜 본 일이 없었노라.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고 그들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나니라”라고 하였다.
송도성은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을 당하여 비통한 가운데 수위단 중앙으로 피선되어 정산종사를 보필하였고 8·15광복을 맞자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 서울에서 귀환동포의 전염병이 감염된 줄도 모르고 교단의 중요 현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트럭으로 서울에서 총부로 내려오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원기 31년 40세를 일기로 소태산 대종사의 게송을 암송하면서 열반하였다.
원기 76년 소태산 대종사 탄생 100주년 성업봉찬대회를 기해 송도성의 법위를 정식대각여래위로 추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