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님은 삼일운동을 개벽의 상두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서 방언(防堰)마치고 기도하자고 하셨습니다. 이 뜻이 정말로 깊은 것입니다. 우리가 삼일절 산상기도를 금년에도 올렸고, 작년에도 올렸고, 그전에도 올렸고, 앞으로도 계속 올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운이 모여서 일상원(一相圓), 중도원(中道圓), 시방원(十方圓)이 되어야 합니다. 일상원은 자신성업봉찬입니다. 중도원은 교화대불공입니다. 시방원은 우리 원불교가 세계에 편만(遍滿)해서 주세교단으로 우뚝 서는 소식입니다. 일상원 속에 이 대적공실 법문의 모든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와 대적공실 법문적공을 함께 해야 훨씬 더 효과를 봅니다. 지성으로 기도하면서 공부하면 그 공부가 날로 성숙될 것입니다. 일상원은 진리에 합일해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고 나서 내 옆에 모든 사람, 모든 만물과의 관계 속에 불공을 잘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교화대불공을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시방세계에 일원상진리가 편만해 질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세교단이 세계에 우뚝 설 것이다.
우리는 숨을 쉬고, 땅에 앉아있고, 햇빛 받고 물마시면서 이 천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걸 못 느끼고 삽니다. ‘공기를 느껴봐라.’ 느낄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그냥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대종사께서 ‘공기의 은혜를 느껴봐라.’ 우리 주위에 공기가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한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폐가 하루 스물 네 시간 계속 숨을 쉬면서 나를 살리도록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마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폐가 기분이 나쁠 것 같은데 안 그렇지요 베풀었다는 상이 없습니다.
대산종사님은 젊은 시절에 결핵을 앓아서 폐가 한쪽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섭생(攝生)을 잘 하셨는지 팔십이 넘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대산종사님은 한쪽이 약하시니까 늘 다른 한쪽 손을 잡아드려야 했습니다. 늘 옆에서 잡아드리는 것이 처음에는 단점이었는데, 한쪽은 스틱을 잡고, 한쪽은 시자(侍者)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뵈러 오는 교도들, 학생들이 서로 손을 잡으려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나중에는 장점이 됐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각설이타령 소리 듣고 ‘아! 이것이 한 소식을 꿰뚫는 것이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이걸 보니까 정말로 깨달을 각(覺)을 전하는 말씀(說)이다. ‘어허’ 하는데 이것은 어조사 어(於), 빌 허(虛), 텅 비고 비었구나. ‘시구시구’에서 화살 시(矢)자에 입 구(口)자면 알 지(知)자 아닙니까. 텅 비어있는 앎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진공묘유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절시구’ 끊을 절(絶)자. 지금의 애착, 욕망, 탐착을 일순간에 딱 끊어버리고 공적영지(空寂靈知)한 앎의 세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불법(佛法)의 세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마삼근(麻三斤)이니라.’답했습니다. 마가 세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선사가 마로 된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순간에 물어보니 바로 그렇게 답한 것입니다. 또 어떤 스님이 화장실에 갔는데 제자가 질문이 급해서 화장실까지 쫓아가 ‘불법의 세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요. 스승이 옆을 바라보니 똥 막대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똥막대기니라.’ 잣나무를 감상하고 있는데 제자가 물어봅니다. ‘불법의 세계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잣나무가 눈앞에 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소식 같지만 바로 알고 보면 우리 앞에 나타난 모든 것이 진리 아닌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일체만물은 확연히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허공 전체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 소식이 우리 자성(自性) 소식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그 허공을 깊이 궁구하고 연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깊게 연마하고 궁구하지 않으면 절대 안 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연마하고 궁구해야 합니다.
육조대사가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한 구절 듣고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도저히 한발자국도 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었던 ‘대적공실’ 법문에 과거 부처님부터 조사님,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등 맥맥히 이어온 법맥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도 공부해 나가면서「정전」한 구절,「대종경」한 구절, 스승님 한 말씀, 의두 한 말씀을 딱 보면서 그렇게 들어가 보십시오. 스쳐 지나가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깊이 관조(觀照)하고 궁구(窮究)하고 다 같이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대산종사님께서 그 염원이 얼마나 간절하신지 대산종사의 일생을 보면 한마디로 모든 사람을 다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 한 해 동안에 백년성업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자신성업봉찬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알려면 오늘 우리가 봉독한 이 대적공실 법문과 기원문을 가지고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 교화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현실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화의 전망은 한량없이 밝습니다. 우리 원불교는 희망이 있습니다. 멀리 아프리카, 유럽, 모스크바,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미주 등 교역자들이 대종사님 법을 전하려고 혼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해 대산종사님 탄생 백주년에 담긴 의미를 마음에 담고 살도록 합시다. 내년 원불교백년기념성업을 자신성업봉찬, 교화대불공으로 큰 축제되도록 합력하여 나갑시다.